2020-02-06 작성
익산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떤 모습으로 복원 되었는지 궁금하였기에 이 번(2020년 1월)에 답사코스를 익산을 중심으로 둘러 보기로 하고 방문을 하였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함께 교과서에 실려 있을 만큼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탑이면서 우리나라의 불탑의 역사에서 목탑과 석탑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석탑이다. 목탑의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통하여 통일 신라의 석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통 이해하고 있는데, 복원전 반이 무너져 서쪽면을 시멘트로 일제강점기때 발라서 지탱해 놓은 상태만으로도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석탑이었는데, 온전했을때의 위용을 쉽게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익산미륵사탑을 보기전 시간 순서는 어긋나지만 의자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석탑을 방문하였다. 지금은 전시관과 주변을 잘 정비해 놓았고, 전시관에서 여러 가지 설명자료와 3D 만화영화로 탑과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 잘 설명해 놓아서 오래전 기억과는 주변의 많이 달랐다. 왕궁리 5층 석탑은 첫눈에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생각날 만큼 ‘나 백제 탑이요!’ 하는 모습이다. 정림사 탑도 이나 미륵사지 탑처럼 왕궁리 5층 석탑도 처마의 끝을 살짝 치켜올리는 형태가 과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곳이 왕궁리로 불리는 이유는 의자왕때 만들어진 궁궐때문인데 금마를 중심으로 하는 익산 지역은 우리 나라의 고대사에서 범상치 않은 지역임을 말해준다.

전시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보통 역사시간에 백제의 수도 이동을 한성, 웅진, 그리고 부여의 순으로 이동하낟고 배우는데, 여기에 왕궁리를 추가하여 놓았다. 역사에 정말 관심이 많지 않거나 이곳을 찾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알기 어려운 사실이다.

왕궁리 유적을 돌아본후 금마를 지나 미륵사지로 이동하였다. 미륵사지 주차장에 차를 세운후 정면에서 왼쪽편으로 있는 순두부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晩食而當肉 - 늦게 먹는 식사에 고기맛이 난다! ' 즉 배고플때 먹는 식사가 가장 맛있다는 의미일텐데, 같이 식사를 하신분들이 모두 인생 최고의 순두부를 먹었다고 칭찬할 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이 이번에 복원된 미륵사지탑이고 오른쪽은 몇해전에 세운 동탑이다. 두개가 쌍둥이 탑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오른쪽의 동탑의 흔적은 터만 있고 석재라던지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이것도 불가사이한 일이다. 억불정책의 기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건축자재로 가져갔을 수도 있겠지만... 가운데 목탑자리가 있는데 이것이 사라진 것은 목탑의 특성상 충분히 이해되긴 하지만 기록에서도 이부분을 확일할 수 없는 것 같다. 왼쪽의 탑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조선까지는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의 무왕때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왕이 용화산아래의 미륵 삼존을 만난 것을 계기로 세원진 사찰'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진의 좌우에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07년 방문했을 때의 사진인데 당시 한창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다행히 복원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하여서 해체의 과정을 조금 볼 수 있었다. 당시 방문했을때는 일제 강점기때 흔적기이었던 콘크리트는 제거된 상태였는데, 당시에는 동탑과 같은 형태로 복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세월속에 나이들어 가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기에 동탑처럼 복원하는 것에 걱정이 좀 되었다. 그러나 실제 복원은 아래의 사진처럼 우리가 보았던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이렇게 복원될수 밖에 없는 것이 동탑처럼 복원을 하려면 상륜부쪽으 새돌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했을때 하층부의 오래된 돌들이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타당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만든 동탑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는 기계로 뚝딱 만든 탑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세월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세월이 주는 선물을 후대에는 즐기게 될 것이다.
해체와 복권 과정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사실은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에 대한 문제였다. 탑신부에서 발견된 명문에 무왕의 부인을 당시 백제 귀족중 최고였던 집안인 '사택'이라는 성을 가진 여자가 무왕의 부인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무왕의 부인이 신라의 선화공주라면 당연히 왕비의 성이 '김씨'여야 하는데... 이 명문을 통하여 '서동요'의 역사적 진실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왕의 부인이 1명이라 단정할 수 없고, 재혼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단정적으로 서동요는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서동요에 나타난 '마를 파는 백제의 왕족'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 국가간의 적대적 관계를 뛰어넘는 이 사랑이야기는 여전이 유효하다.

확실히 복원된 모습의 미륵사탑은 이전에 비해서 안정감있고,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세월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것은 아쉽게 생각된다. 세월과 함께 자연속에 녹아 있는 문화재들에 항상 감동을 많이 느끼는데, 이젠 확실히 인간의 관리 영역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많이 난다. 당연히 우리의 오래된 문화재들 잘 관리하고 정비해야 겠지만 . .

콘크리트로발라져 있던 면은 위의 사진처럼 새로운 돌과 믹륵사탑의 원래 돌들로 정비가 되었고, 탑의 모습에서 깨끗해 보이는 돌들이 새롭게 깨워 맞춰진 석재들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동탑은 미적인 느낌도 없고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묻고 싶지만 그래도 이 복원된 탑을 보면서 서탑의 원래 모습과 목탑지에 황룡사 9층 목탑을 닮았을 목탑도 상상해 본다. 무왕은 정말 수도를 금마로 옮길려고 하였을까?
마한 목지국의 중심이었고, 무왕이 태어나고 왕궁을 건설하였으며, 후에 견훤이 후백제의 중심으로 삼았던 곳.... 익산은 우리 역사에서 절대 잊혀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곳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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