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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순에서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님을 만다다!

역사의 내용을 전다할때 전달자의 현장감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전공자로서의 관심뿐만 아니라, 역사의 전달자인 역사 교사로서 현장감을 살리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게 되었다.

 

 

2016년 7월 23일

 아침 9시 40분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대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새벽을 달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5시경. 남은 시간 부족한 잠을 염치 불구하고 의자에 누워서 채우다가 예정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모였다.

 이번 답사에슨 전남지역 교사들과 경기 지역 교사들도 함께 했으며, 겨레하나 더하기 휴가 진행하였고, 장창순 교수의 안내로 진행되었다.

 아침으로 김밥을 먹으면서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오른지 1시간 정도 지나자 대련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도착후 바로 이동한 곳은 여순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이번에 안내를 맡게된 중국 교포 '김호남' 가이드와, 별명이 '와장창'이라고 소개하신 장창선 한세대 교수님으로부터 이번 답사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평화 감성 기행' 인 이유를 설명하셨고, 첫번째로 가게된 목적지로 러.일 전쟁의 현장인 203 고지에 대한 설명도 가략하게 함께 진행이 되었다.

203 고지의 위령탑. 일본군이 그 때 사용된 탄환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의 발발이후 러.일 전쟁이 일어난 가장 핵심 지역인 여순항을 차지 하기 위한 두 나라의 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이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여순항을 봉쇄 하였으나, 우수한 해안포대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군을 일본이 쉽사리 무너트릴 수 없었고, 발트함대를 기다리는 러시아군도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2만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내고 있었던 일본군이 승기를 잡은 것은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203 고지를 점렴하면서부터였다. 12월 5일 하루동안 8000명을 희생시키고 203 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고지에서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해군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의 희생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 전투를 지휘한 일본의 육군 사령관 '노기'는 일본 천황에게 자살을 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국 메이지 천황이 자신이 죽기 전에는 자살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자,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날 노기 부부가 할복 자살 하였다고 한다.

  203 고지에 있는 지도. 사진의 왼쪽 노란색이 보이는 부분이 203 고지이다. 일본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산의 반대편으로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지를 빼앗고 포대를 설치함으로서 승리할 수 있었다.

 

203고지에서 바라본 여순 항구의 전경. 여순항구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포. 일본군을 막기 위한 러시아군의 화포였다. 

 

러.일 전쟁은 우리에게는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본격화 되는 그 시작이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통하여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은 8만 1000명이 사망했기에 전쟁 참여자 6명중 1명이 사망한 셈이다. 일본이 펑텐 전투와 대마도에서의 발틱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군비와 포탄이 바닥났고 더이상 전쟁을 이끌 힘도 없었다. 러시아도 갑자기 찾아온 국내 혁명으로 전쟁을 끝내야함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재에 나선 미국의 의도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아시아에서의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2차 대전 종전이후 애초에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 적용하려던 것이 냉전의 성립이후 일본을 냉전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일정책이 지금이나 그 때나 크게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한반도는 옵션으로 끼어 있는 형국이다. 청.일 전쟁이 그러했고 러.일 전쟁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반도는 여전히 열강의 대립 사이에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203고지에서 너무 더웠다. 오기전 확인한 일기예보에 장마 전선의 북상으로 북.중 국경지역은 전반적으로 비가 오고 흐릴 것으로 예상된 만큼 높은 습도에 더해진 더위는 숨을 막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기내식도 먹었지만 배가 고파왔고 때마침 점심 식사도 예정되어 있었다. 중국에서의 첫번째 식사는 그냥 중국식이었다.

 

 

여순 거리 풍경은 높은 건물도 있었지만 과거와 현대가 혼재 된 듯이 삼륜자동차에서 벤츠와 아우디가 함께 있었다. 독일산 자동차가 특히 많이 보이는 이유는 중국의 단면인듯 하다. 식사는 사진처럼 한식이든 중국식이든 돌림판 위에 차려진 음식을 골라 먹는 것이었다. 돌림판 돌리기전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음식을 집으려던 다른 분이 의도 하지 않게 음식을 흘리게 만들 수도 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여순 감옥으로 이동중 소나기는 폭우로 변했다. 그 정도의 비는 아닌 듯 했지만 주변 도로위로 물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여순 감옥 주차장에서 비가 좀 잦아 들기를 기다리다가 우선 관동법원을 먼저 보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진 관동 법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순 지역을 조차하고 그곳에 법원과 여순 감옥등을 건설하였다.  역사유적지로 보존 되고 있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가 주인공이었고, 한글과 함께 관련 설명이 있어서 관람에 도움이 되었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안중근 의사 재판 관련 책을 읽고 와서 그런지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당시의 상황에 머리속에 생생하게 뜨오르는 듯 하였다. 

관동법원 안에는 일제가 사용한 고문 기구 같은 것도 전시된 공간이 있다. 

 

관동법원 답사를 마치고 뤼순 감옥으로 이동하였다.

뤼순 감옥. 흰색의 벽돌은 러시아 점령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빨간색은 일제의 점령기에 만들어진 감옥이다. 

전시관에는 신채호 선생님께서 머물렀던 감옥도 보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회령 등 이곳에 복역하셨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전시도 있었고, 우리나랄 서대문 형무소를 소개하는 관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 전시관에서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많은 공간을 할애하여 추모관을 두고, 당시 형이 집행되었던 공간도 재현해 두었다. 형이 집행되었던 곳 앞에 서니 눈물이 나려고 하였다. 가끔 어떤 수련과 수행과 마음가짐이 있어야 이런 분들의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보지만, 항상 결론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길을 그분들이 갔다는 것이다. 

 

 

 

추가글) 2023년 3월 1일.  

2016년도의 답사는 압록강 두만강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현장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당시 이 답사에 참석하신 분들과 정말 많은 토론과 이야기들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답사 내용의 기록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